보험의 지도
결혼 1년차 서지우는 어느 일요일, 집 안 서랍에서 보험증권 여덟 장을 꺼냈다. 부모님이 고등학생 때 들어 준 종신보험, 대학 선배에게 가입한 암보험, 차를 사면서 든 운전자보험, 전세 계약 때 든 화재보험. 매달 빠져나가는 돈은 28만원인데, 무엇이 무엇을 지켜 주는지 한 줄로 말할 수가 없다. 약관은 수백 쪽이고, 같은 '암 진단비'도 계약마다 조건이 다르다. 지우는 대학 동기이자 보험설계사인 한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거 제대로 들어 있는 거야?"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보험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왜 설계사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지, 그리고 복잡함 속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를 숫자를 직접 움직이며 확인한다.
- 보험이 보통의 상품과 무엇이 다른지(지금 내고 나중에 어쩌면 받는다, 써 볼 수 없다, 수십 년 간다) 설명한다.
- 100명이 위험을 나누는 마을에서 보험료가 보험금과 사업비로 어떻게 갈라지는지 본다.
- 가입자·설계사·보험사·재보험사·감독기관이 얽힌 보험 생태계의 지도를 그린다.
- 보험이 복잡해지는 다섯 가지 원천과, 설계사가 존재하는 이유를 미리 훑어본다.
- 설계서 한 장에 담긴 숫자가 이 책의 어느 장에서 풀리는지 찾아간다.
보험이라는 이상한 상품
커피 한 잔을 사면 바로 마신다. 맛이 없으면 다음에는 안 산다. 노트북을 사면 매일 쓰고, 고장 나면 고친다. 보통의 상품은 돈을 내는 순간과 가치를 얻는 순간이 가깝고, 써 보면 좋은지 나쁜지 안다. 보험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거꾸로다.
보험은 지금 확실하게 돈을 내고, 나중에 어쩌면 돌려받는 약속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해에 보험금을 한 푼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보험이 "좋은 거래"였는지는 나쁜 일이 실제로 일어난 다음에야, 그것도 약관에 적힌 조건과 맞아떨어질 때에만 알 수 있다. 이런 상품을 경제학은 조건부 청구권(Contingent claim)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에서만 돈을 받을 권리를 산다는 뜻이다.
보험이 어떻게 이런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는 많은 사람을 한데 모아 보면 보인다. 아래 마을에는 100명이 산다. 해마다 몇 명에게 사고가 나고, 사고가 나면 1,000만원을 잃는다. 마을 사람들은 연초에 보험료를 한곳에 모으고, 사고가 난 사람에게 1,000만원씩 준다. 보험사는 이 일을 대신 해 주는 대가로 보험료의 일부를 사업비로 가져간다. 사고 확률과 사업비 비율을 바꾸면서 몇 해를 돌려 본다.
100명 마을의 1년
여기서 이 책 전체를 꿰는 세 가지가 보인다. 첫째, 혼자서는 0원 아니면 1,000만원이던 위험이 모이면 예측 가능한 비용이 된다. 이것이 위험의 결합(Risk pooling)이고, 2장에서 수학으로 다룬다. 둘째, 보험료는 "평균 보험금 + 사업비"다. 가입자 전체로 보면 보험은 평균적으로 손해 보는 거래이고, 그런데도 사는 이유가 있다(2장). 셋째, 사업비 슬라이더가 보여 주듯 같은 보장이라도 어떻게 팔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라진다(15장).
보험을 둘러싼 사람들
마을 이야기에서는 보험사 하나만 등장했지만, 실제 보험 한 건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얽힌다. 가입자는 보통 보험사를 직접 만나지 않는다. 보험설계사(Insurance agent)를 만나거나, 은행 창구, 전화, 인터넷으로 가입한다. 보험사는 혼자 감당하기 큰 위험을 다시 재보험사(Reinsurer)에 넘긴다. 사고가 나면 병원 서류가 오가고, 보험금 액수를 따지는 손해사정이 끼어든다. 이 모든 과정을 금융당국이 감독한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여겨볼 곳은 판매채널이다.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에는 판매 비용이 들어 있지만, 그 비용이 얼마인지는 영수증에 따로 찍히지 않는다. 보험료가 어디로 가는지 직접 쪼개 본다. 상품 종류를 고르고, 첫해에 몰려 나가는 판매 비용인 신계약비와 해마다 나가는 유지비를 바꿔 본다. 도넛은 내가 평생 내는 보험료 1만원이 평균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이 책의 교육용 모델(3장의 3이원방식)로 계산한 것이다.
보험료 1만원은 어디로 가는가
평균적으로 보면 보험료의 대부분은 보험금이나 환급금으로 가입자들에게 돌아간다. 다만 그것은 가입자 전체에게 돌아간다는 뜻이지, 내가 돌려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비용 몫은 상품이 복잡하고 판매에 손이 많이 갈수록 커진다. 이 장의 나머지는 그 복잡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살핀다.
보험은 왜 이렇게 복잡한가
지우의 서랍 속 보험 여덟 장을 펼치면 특약만 서른 개가 넘는다. 같은 '암 진단비'도 계약마다 보장이 시작되는 날, 처음 1년의 감액, 갑상선암을 어떻게 치는지가 다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책은 복잡함의 원천을 다섯 갈래로 나눠서 본다.
복잡함은 추상적인 말로만 들으면 와닿지 않는다. 아래는 가상의 보험사 A손해보험의 가입설계서 한 장을 줄인 것이다. 줄마다 숫자와 용어가 빽빽하다. 궁금한 줄을 눌러 본다. 그 숫자가 왜 거기 있는지, 이 책의 몇 장에서 풀리는지 알려 준다.
설계서 한 장의 숫자들
열두 줄을 다 눌러 보면 설계서 한 장이 사실상 이 책의 목차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험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숫자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원리(확률, 금리, 정보, 법, 판매)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 원리들을 한 번씩 손으로 만져 보면 설계서는 더 이상 암호가 아니다.
- 보험기간과 납입기간: 언제까지 보장하고 언제까지 내는가.
- 갱신형 표시: 나중에 보험료가 오를 수 있는 담보가 어느 것인가.
- 환급형: 표준형인가, 무해지·저해지인가(중간에 해지하면 얼마를 돌려받는가).
- 면책·감액 기간: 가입 직후 보장되지 않거나 절반만 나오는 기간.
- 월 보험료 중 주계약과 특약의 비중: 정말 필요한 담보에 돈이 가고 있는가.
보험설계사는 왜 존재하는가
예금이나 주식은 은행 앱에서 스스로 가입하는 사람이 많다. 보험은 다르다. 한국에서 보험은 여전히 상당 부분이 사람을 통해 팔린다. 보험만 유독 '파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답은 사람들이 드물고 큰 위험을 실제보다 작게 느낀다는 데 있다.
아래 100명은 앞으로 10년 동안 각자 일정한 확률로 큰 병에 걸린다. 각 사람은 자기가 느끼는 위험(체감 확률)으로 보험의 가치를 따져, 보험료보다 가치가 크다고 느낄 때만 스스로 가입한다. 사람들이 위험을 얼마나 작게 느끼는지, 먼 미래의 손실을 얼마나 깎아서 보는지(현재 편향(Present bias))를 바꿔 본다. '10년 흘려보내기'를 누르면 실제로 병에 걸리는 사람이 빨간 테두리로 표시된다.
스스로 가입하는 사람은 몇 명일까
설계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수백 개 상품 가운데 내게 맞는 조합을 찾는 탐색 비용, 설계서와 약관을 이해하는 해석 비용, 사고가 났을 때 무엇을 청구할 수 있는지 아는 사후 관리다. 설계사는 이 비용을 대신 진다. 그런데 설계사의 보수는 가입자가 아니라 보험사가 주고, 보수의 크기는 대체로 보험료가 크고 계약 초기일수록 크다. 그래서 가입자에게 꼭 필요한 것과 설계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어긋날 수 있다. 이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을 어떻게 다룰지가 14장과 15장, 그리고 설계사를 위한 19장의 주제다.
이 책의 지도와 읽는 법
책은 다섯 부로 나뉜다. 원리(2~4장)는 위험을 나누는 수학, 보험료가 만들어지는 방식, 정보 비대칭을 다룬다. 구조(5~7장)는 보험이 복잡해지는 이유와 약관·설계서 읽기, 갱신과 환급형을 다룬다. 상품(8~13장)은 실손, 진단비, 생명보험, 저축성보험, 손해보험,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보험을 하나씩 해부한다. 시장(14~17장)은 설계사와 판매채널, 수수료, 보험회사의 속사정, 청구와 분쟁을 다룬다. 설계(18~19장)는 이 모든 것을 모아 보장을 짜는 법과, 설계사가 좋은 상담을 하는 법을 다룬다. 20장 실험실에서는 자기 가족의 숫자를 넣어 본다.
모든 장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아래에서 지금 내 처지를 고르면 먼저 읽을 장이 밝게 표시된다.
나에게 맞는 읽기 경로
각 장에는 세 종류의 상자가 있다. 설계사 노트는 현장 실무자를 위한 화법·서류·흔한 실수를, 가입자 체크는 설계서와 증권에서 바로 확인할 항목을, 심화는 수식이나 제도의 깊은 이야기를 담는다. 일반 독자는 설계사 노트를 건너뛰어도 되지만, 읽어 두면 상담을 받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지우네 보험 서랍
이 책의 장마다 같은 가족이 등장한다. 32세 개발자 서지우와 31세 디자이너 윤민서 부부, 그리고 둘의 보험을 함께 들여다보는 GA 소속 3년차 설계사 한도윤이다.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아래 도넛은 지우네가 지금 매달 내는 보험료를 계약별로 나눈 것이다. 조각에 손을 올리면 어떤 계약인지, 언제 누가 가입했는지가 뜬다.
지우네가 매달 내는 보험료
보험 여덟 장, 월 28만원, "이게 제대로 들어 있는 거야?"
지우의 서랍에는 계약이 여덟 개다. 지우 앞으로 종신보험(월 12만원), 2세대 실손(월 2.8만원), 20년 갱신형 암보험(월 3.2만원), 운전자보험(월 1.5만원), 주택화재보험(월 0.9만원), 자동차보험(연 74만원), 민서 앞으로 4세대 실손(월 1.4만원)과 회사 단체보험이 있다. 자동차보험까지 합쳐 월 28만원, 둘의 월 실수령 590만원의 약 4.7%다. 지우가 아는 것은 "부모님이 들어 준 것, 선배가 권한 것, 차 살 때 든 것" 정도다.
도윤은 첫 통화에서 약속 두 가지를 한다. 하나,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는 아무것도 팔지 않고 지금 가진 보험부터 분석한다. 둘, 무엇을 권하게 되면 그 상품에서 자기가 받는 보수의 대략적인 크기도 함께 말한다. 도윤도 안다. 친구의 서랍에서 종신보험을 새 상품으로 바꾸게 하면 자기 수입은 크게 늘지만, 그것이 지우에게 좋은 일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둘은 증권 여덟 장을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것으로 상담을 시작한다.
핵심 정리
- 보험은 지금 확실하게 내고 나중에 조건이 맞을 때만 받는 조건부 청구권이다. 써 보기 전에 품질을 알 수 없고, 가격이 사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계약이 수십 년 간다.
- 많은 사람이 위험을 모으면 개인에게는 0 아니면 전부였던 손실이 예측 가능한 비용이 된다. 보험료는 평균 보험금에 사업비를 더한 값이다.
- 보험 한 건에는 가입자, 판매채널, 보험사, 재보험사, 손해사정, 의료기관, 금융당국이 얽힌다. 판매채널의 보수는 보험사가 준다.
- 복잡함은 위험의 다양성, 정보 비대칭, 긴 계약, 규제와 세제, 판매 경쟁에서 온다. 앞의 넷은 필요한 복잡함에 가깝고, 판매 경쟁이 만든 복잡함은 가려서 봐야 한다.
- 사람은 드물고 큰 위험을 작게 느끼고 먼 손실을 깎아 본다. 그래서 보험은 스스로 사기보다 팔리는 상품이 되었고, 설계사는 탐색·해석·사후 관리의 비용을 대신 지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그 보수 구조에서 이해상충이 생긴다.
확인 퀴즈
보험을 '조건부 청구권'이라고 부르는 이유로 가장 알맞은 것은?
100명 마을에서 1년 사고 확률 5%, 피해 1,000만원, 사업비가 보험료의 20%라면 1인당 보험료는?
다음 중 '판매 경쟁이 만든 복잡함'에 가장 가까운 것은?
보험설계사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균형 잡힌 것은?